유안이 루이즈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이었다.
대대로 저명한 의학자를 배출한 펠리에세 가문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은 늘 바빴다.
가주인 아버지는 수도에서 의학자들과 교류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돕기 위해 행사 등에 쫓아다녔다.
어린 유안이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건 한겨울뿐이었다.
겨울엔 부모님도 펠리에세 저택으로 돌아와 내년을 계획하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 동안 어린 유안은 외로움에 몸부림쳤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의 흔적을 쫓고, 어머니의 침실에서 겨우내 머물렀던 그녀의 향기를 찾아 어슬렁거렸다.
부모님은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펠리에세의 숙명이라 했다.
귀족은 일하지 않지만 펠리에세는 다르다.
펠리에세가 이만한 명성을 가진 건 초대 가주가 유명한 의사였고 아주 오랜 옛날 황제를 죽음에서 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되며, 펠리에세의 힘을 지켜야 한다고도 했다.
부모님은 꽤 엄했지만 동시에 다정했다.
그래서 유안은 늘 겨울을 기다렸다.
부모님과 유안. 이렇게 완벽한 가족이 집에 있는 게 좋았다.
아, 아니지.
‘완벽한’ 가족이 되려면 루이즈도 있어야 했다.
루이즈는 10살이었던 유안이 태어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언니였다.
펠리에세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도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따뜻한 남부의 어떤 제도에서 요양 중이라는 이유였다.
[유안, 내 아가. 드디어 네 언니를 펠리에세로 데려갈 수 있단다. 기뻐하렴.]
10살 겨울.
어머니에게서 도착한 짧은 서신에 유안은 기뻐 날뛰었다.
드디어 언니가 저택에 온다.
부모님의 부재중인 이 넓은 저택에 드디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작은 가족이 생긴다.
부모님과 루이즈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의 완벽한 가족이 올겨울을 이 저택에서 보낸다.
그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어린 유안을 가슴 벅차게 했다.
유안은 그날부터 매일 행복한 상상을 했다.
예쁘게 차려입은 12살짜리 소녀가 유안을 보며 활짝 웃어주는 얼굴.
그리고 그 뒤에서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는 부모님.
홀로 걸었던 복도를 둘이 걷고 늘 심드렁했던 사용인들 사이를 함께 뛰어다니는 모습.
자매가 자라 모든 소녀들의 꿈인 황궁 데뷔탕트 무도회 때 입을 옷을 함께 고르는 장면까지도.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하지만 닥쳐온 현실은 상상과는 정반대였다.
“아가씨, 마님께서…… 백작님께서…….”
다급한 발걸음.
벌컥 열린 거대한 현관에서 불어닥치는 눈보라.
수염에 작은 고드름을 매달고 나타난 기사들과 창백한 얼굴의 집사.
“루이즈 님을 모시고 눈길에 마차를 달려오시다 그만…….”
두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기사의 뒤로 또 다른 기사 한 명이 한 소녀를 보호하며 저택으로 들어왔다.
빨갛게 얼어버린 얼굴로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굳어 있던 낯선 소녀는 유안을 발견하자마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우뚝 섰다.
그리고 곧 부축을 마다하며 유안에게 비틀비틀 걸어왔다.
“네가 유안이구나.”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는 무척 여렸다.
“네가 내 동생이구나.”
소녀는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오도카니 서 있는 유안에게 성큼 더 다가왔다.
“내가 네 언니, 루이즈 펠리에세야.”
그리고 찬 기운이 도는 품 안으로 유안을 끌어당겨 꼭 안았다.
자세를 낮춘 루이즈의 작은 어깨 너머, 두 장의 망토로 덮어놓은 무언가가 보였다.
부모님의 시신이었다.
***
펠리에세 백작가의 비극에 그다지 특별한 점은 없었다.
백작 부부의 죽음은 겨울이면 흔히 있는 마차 사고였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친척에게 맡겨지는 상황은 아주 일반적이니까.
아이들만 남은 집에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 숙부와 그 가족들이 들이닥치는 일도 어찌 보면 그리 유별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 모두 펠리에세란다!”
다만 어린 유안에게 숙부는 생전 처음 본 사람이었다는 것.
“이젠 진짜 한 가족이란 뜻이지!”
그리고 유안이 생각하는 보살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
유안은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여기가 형님의 연구실이로군.”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카락을 억지로 기름칠해 올려놓은 숙부, 게렛 펠리에세는 아버지의 흔적으로 가득한 연구실 책상에 육중한 엉덩이를 들썩이며 주저앉았다.
감회가 남다른 듯 위용이 넘치는 의자 손잡이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혼자 울컥했다가 책상 위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내가 이 자리에 앉게 될 줄이야.”
금고 문을 열고 혀를 쯧, 차던 숙부는 연구실 문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유안을 보고는 딱 한 마디 했다.
“네 아버지가 황금이나 땅문서 같은 것 숨겨놓은 금고는 없느냐?”
***
숙모인 프리실라는 깡마른 몸에 키가 아주 작은 여자였다.
짙은 화장을 하고 작은 키를 감추기 위해 높은 구두를 신고 휘청이던 그녀는 어머니의 체취가 남은 침실을 마음껏 헤집고 다녔다.
“살림은 별것 없어도. 썩 귀해 보이는 건 많네.”
화려한 차림새의 숙모는 어머니의 단정한 옷들이 걸린 옷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귀족이라 기대했는데, 옷들은 죄다 책 냄새나는 것들뿐이고.”
숙모는 그 길로 대부분의 하녀들을 내쫓고 펠리에세 저택을 자신이 데려온 사람들로 채웠다.
어머니의 보석함을 열어 마음껏 팔아 치우고는 자신의 취향으로 펠리에세 저택을 바꾸어 갔다.
“이 쬐끄만 한 계집애가 장부를 볼 줄 알아?”
상인의 딸이었지만 숫자와는 거리가 멀었던 숙모는 내쫓아야 할 하녀 취급하던 유안이 그동안 집사의 어깨 너머로 장부 정리를 배웠다는 걸 듣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마침 시녀가 필요했는데 잘됐어.”
***
새로운 펠리에세 백작 부부가 데려온 사촌들은 유안의 상식을 모조리 뛰어넘는 아이들이었다.
유안과 동갑인 레지나는 숙부를 따라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현관부터 1층 로비, 계단 난간의 장식품까지 뜯어보며 입맛을 다시던 어린 레지나는 유안의 방에 들어가서는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이게 이제 다 내 것이란 말이지!”
떡하니 방의 주인이 그녀를 따라왔어도 레지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허겁지겁 옷장을 열어 옷들을 뒤적거리고 서랍과 보석함을 열어 유안이 생일 선물로 부모님께 받은 장신구들을 마구잡이로 걸어보았다.
“하나 같이 나랑 더 잘 어울리잖아, 그치?”
숙부도 숙모도 딸의 그런 무례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숙부는 아버지에게 숨겨둔 재산이 없는지 변호사와 상의하느라 바빴고, 숙모 역시 온 집 안을 들쑤시고 다니며 어머니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예술품이나 보석들을 찾아내 값을 매기기 바빴다.
“펠리에세 백작 영애? 풉.”
집안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집사가 유안을 그리 불렀을 때, 레지나가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며 웃었다.
눈물이 날 만큼 꺽꺽대며 웃던 붉은 머리, 초록 눈을 한 새초롬하게 어여쁜 사촌은 유안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독설을 날렸다.
“이제 펠리에세 백작은 내 아버지야. 넌 이제 내 어머니의 시녀이자 내 하녀나 마찬가지고. 주제를 알아야지.”
방을 빼앗긴 뒤로 늘 새롭게 배정된 유안의 방을 찾아와 하나라도 더 가져갈 건 없는지 눈에 불을 켜던 레지나는 결국 유안이 부모님의 장례식 내내 입고 있던 검은 원피스마저 ‘하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진짜 하녀의 것과 바꾸었다.
항의하던 집사는 쫓겨났고, 어안이 벙벙해졌던 하녀장마저 저택에서 떠나자 유안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점점 시들어갔다.
새로 온 사용인들은 유안과 루이즈를 아가씨 취급은커녕 펠리에세 백작 부부가 보지 않을 때면 레지나와 프레데릭과 함께 괴롭히는 데 동조했다.
식사는 알아서 챙겨야 했고 레지나가 다 빼앗아 가고 몇 벌 남지 않아 작아진 옛날 옷은 자매가 스스로 세탁해야 했다.
그나마 하녀 취급을 받지 않기 시작한 건, 펠리에세의 가업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숙부가 유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가뜩이나 선대와 비교당하기 일쑤던 숙부는 가족에게는 적당히 둘러대고 유안을 연구실로 불러들였다.
자연스럽게 사용인들도 연구실을 드나드는 유안을 하녀 취급할 수만은 없었고, 숙모 역시 골치 아픈 장부 정리를 위해 유안을 필요로 했으므로 태도가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
와중에 저택에서 유안을 가장 거슬려 한 건 레지나와 프레데릭이었다.
특히 모두가 출입 금지인 연구실에 유안이 마음껏 드나든다는 사실은 레지나뿐만 아니라 집안일에 통 관심이 없던 프레데릭까지 삐뚤어진 계기가 되었다.
“난 여자도 때려. 건방지게 굴면 그 낯짝을 못 쓰게 만들 줄 알아라.”
숙부 대신 가문의 일을 돌보고.
쉬지도 못하고 숙모를 돕고.
숙부가 잘했다며 상처럼 건네준 사탕이며 과자까지 레지나에게 다 빼앗긴 뒤였다.
프레데릭은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하는 건장한 소년이었고, 그런 프레데릭의 위협은 유안에게 공포였다.
유안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추모의 발길이 꽤 오랫동안 저택으로 이어지는 동안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을 잃고 낯선 가족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까마득해 멍하니 쪼그려 앉아 있기만 했다.
유안에게 낯선 가족은 언니인 루이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유안 자매를 쫓아내는 문제로 숙부와 숙모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유안의 불안은 최고조가 되었다.
저택을 쩌렁쩌렁 울리는 부부싸움을 함께 듣던 루이즈는 유안에게 조용히 다가와 그녀를 격려했다.
어디서 넘어졌는지, 얻어맞았는지 팔이며 다리에 멍 자국이 선연한데도.
“뭐든 하자, 유안.”
“…….”
“시녀든 하녀든 원하는 걸 더 열심히 해주자.”
“…….”
“우리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야.”
유안은 자신을 안아주는 루이즈의 품에 안겨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억울함과 분노, 원망이 애꿎은 루이즈에게로 향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너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부모님이 너를 데리고 집으로 오느라 무리해서 마차를 달리지만 않았어도.
자주 볼 순 없었어도 늘 따뜻하게 날 안아주던 부모님은 죽지 않았을 텐데.
어린 유안은 늘 꿈꾸었던 언니를 눈앞에 두고도 때때로 원망과 절망에 휩싸였다.
루이즈에게 의지하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늘 악몽을 꿨다.
장면은 늘 같았다.
이른 아침.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눈보라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루이즈가 데려온 부모님의 시신.
힘들 때면 유안은 늘 모든 걸 잃었던 그날로 돌아가는 악몽을 꾸었고, 루이즈는 그런 유안을 알면서도 안아주었다.
“유안, 언니는 너를 사랑해. 늘 네 옆에 있을 거야.”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자 어느 순간부터 유안은 원망을 녹여내고, 루이즈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한 번도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
그리고 다시 지금.
유안은 10년 전 그날처럼.
늘 꾸었던 악몽처럼.
현관 밖에서 불어닥치는 눈바람을 스타베팅 마주했다.
살아 있는 루이즈를 데려갔다가 이제는 죽은 루이즈를 데려온 남자가 제게 한 말을 천천히 되감아 보면서.
“폐황자비 전하.”
콤판니 후작이라 불리는 그 남자가 유안을 부르는 호칭에 저택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했다.
“바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