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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하. 이반느. 어서 닦아. 정말 이러면 안 돼. ……어? 에반, 에반 왔다!!”
아이들을 말리며 곤란해하던 세자르.
그 올곧은 아이는 응접실에 들어와 니아와 인사하는 에반을 발견했다.
아이는 반가움에 단번에 달려가 친구의 손을 잡았다.
“에반, 진짜 걱정했어! 갑자기 퇴소라니. 무슨 스타토토사이트 롤토토사이트 있는 건 아니지?”
“……아, 응.”
그러자 그 소리에 와르르 달려드는 아이들.
“에바아안!!! 로이도 걱정했쟈나!!”
“흥. 어딜 황녀 허락 없이 마음대로 퇴소하려고 해?”
“그래, 어딜 이반느 허락 없이.”
“따라 하지 마!”
“따아라 하지 먀!?”
“야이씨! 거기 안 서!”
“잡을 테면 잡아보시지! 꺄하하아앙!”
-두다다닷!
입 주변 가득 초콜릿이 묻은 이반느가 도망가자, 분노한 샤를 황녀 또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말리는 세자르도, 아이들이 달리니까 다 같이 뛰는 로이도.
난폭한 기차처럼 정말이지 인사조차 조금의 틈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 광경에 에반은 생각했다.
‘시끄럽고 복잡한 킬기스 공작저……?’
완전히 앞뒤가 맞지 않은 단어가 연결된 느낌.
그래서 에반은 되려 긴장이 풀려버렸다.
방 한가득 명확한 의도를 가진 희귀한 성물의 모습도, 할아버지의 지엄한 명령도.
산처럼 쌓인 초콜릿 껍질과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쩐지 눈물이 고인 에반이 몰래 닦아내니, 니아가 위로하듯 말 걸었다.
“……에반, 갠챠나?”
에반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건 속내를 숨기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따라 들어온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역시나 뒤따라온 안톤 공작.
그 냉랭한 시선은 도무지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에반은 머뭇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 걸었다.
“……니아.”
“웅.”
“루시아 전하께서 지금 어디 계신지 알아?”
“엄마?”
니아가 뭘 알고 있는지 먼저 확인하는 에반.
그러나 역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지, 엄마 이야기에 귀만 쫑긋거리고 있다.
마치 사자에게 토끼를 밀고하는 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반느가 뛰던 발걸음을 멈췄다.
“어? 에반 하부지 언제 왓셔!?”
황녀에게 잡혀 볼때기가 늘어진 이반느가 잔뜩 발음 샌 소리로 공작을 가리켰다.
“?”
그 외침에 안톤 공작이 이반느를 쳐다보자, 아이는 샤를 황녀를 뿌리치고 속삭였다.
“우리 준비한 고 있쟈나.”
“아, 맞다. 그렇지.”
“아, 안돼. 안돼요. 이반느! 샤를 전하! 분명 싫어하실……!”
-촤락.
“자, 에반 하부지 위해서 만들었서! 우리 답례야!”
천을 걷자, 전 세계에 하나뿐인 상아로 만들어진 여신의 조각상이 드러났다.
“……헉.”
먼저 에반의 숨 삼키는 소리.
아이의 기억에 저 조각상은 분명 상아의 뽀얀 윤기가 흘렀던 고급스럽고 인자한 여신상.
하지만 지금 그 신성한 여신상에는 초콜릿 수염과 성난 눈썹이 마치 소똥이 발린 듯 치덕치덕, 낙서가 된 것이다.
어쩐지 바닥에 초콜릿 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였더라니.
“에반 하부지는 여신님 조아하니까. 하부지랑 여신님 섞은 고야. 머싯지!?”
“이 황녀도 참여했어요. 휴, 머리카락 칠하는 거 진짜 힘들었어.”
“로이도! 로이도!”
“마, 말리지 못해 죄송해요. 안톤 공작님……! 그래도 초콜릿이니까 잘 닦으면…….”
세자르를 빼고는 자랑하듯, 시커먼 손바닥을 내보이는 아이들.
“…….”
그 모습에 안톤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감히 여신의 성물에 장난을 치다니.
그 누구의 앞에서도 진심을 보인 적 없던 그.
하지만 지금은 고작 6살짜리의 작은 성의에 살벌하게 굳어버렸다.
-으득.
그의 어금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자, 함께 온 비서와 시종마저 온몸을 떨어댔다.
.
.
.
잠깐의 재회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은 하원 시간에 맞춰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에반, 미안해. 공작님께도 전해줄래? 그렇게 나가버리실지 몰랐어. 정말 미안.”
세자르가 잔뜩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유일하게 세자르만이 그 살벌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 세자르. 신경 안 쓰실 거야.”
‘정말 화가 나신 것 같지만, 다른 것이 더 중요하실 테니까.’
“에반. 본국에 도착하면 편지해줄래?”
“……아, 응.”
세자르의 말에 에반은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지금 제국의 땅에서도 검열하는 편지를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그러자 그 대화를 듣던 이반느가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편지눈 무슨. 우리가 놀러 가께. 니아가 더 멀리 있눈데도 잘만 놀러 가눈 걸.”
“맞아. 이 황녀가 움직이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다 같이 가면 아바마마도 보내주실 거야. 그러니 관광 명소 같은 건 그전까지 숙지하도록 해. 에반.”
“우와! 놀러 가눈 고야? 로이눈 무조건 갈고야!”
그러자 옆에 있던 니아도 지지 않았다.
“니아두 놀러 갈럐……! 엄마한테 허락 받으 꺼에여!”
“…….”
에반이 복잡한 심경에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 다가왔다.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분노를 가다듬고 돌아온 안톤 공작이었다.
“니아 왕녀님이라면, 얼마든지 놀러 오시죠.”
“녜에에에-!”
그는 니아에게만 말했지만, 해맑은 아이들은 퍼뜩 대답하고는 마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아가 마차에 오르기 전에, 안톤 공작이 아이를 불렀다.
“왕녀님,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녜?”
“제 손자가 할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
니아는 에반의 앞에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할 말이 있다는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지 않았다.
“에반. 헤어지기 아쉬워 그러느냐. 그럼 이 할애비가 대신 하마. 제 손자가 말입니다. 대신전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갔는데 누굴 보았다고 했었지요. 그게 루시아 전하였던가…….”
-탁.
에반이 니아를 밀치는 소리였다.
“아, 앗.”
그러나 그 강도가 세지 않아, 마차 쪽으로 조금 밀려났을 뿐이다.
에반은 꾹 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뒤돌아보지 말고 가. 네 엄마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뭐 하고 있어! 어서!”
아이의 단호한 외침에 니아는 눈치를 보며 움츠린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출발하는 마차.
남은 할아버지와 손자는 그 마차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할아버지는 한마디 남기고 뒤돌았다.
“네 녀석은 가만히 서서도 기회를 잃는구나. 쓸모없는 것.”
“…….”
에반은 용서해 달라고 빌지 않았다.
니아에게 알려줬듯, 아이 역시 확신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전 쓸모없어요. 하지만 할아버님, 전 알아요. 어머님은 이 선택을 더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
실연의 상처를 안은 리온.
그는 그런 일이 있고도 상처를 준 여인의 딸 하원을 위해 급하게 돌아왔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매우 지친 모습이었지만, 이내 들려온 아이의 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니아. 아니, 왕녀님, 다시 말씀해 주세요. 오늘 어딜 다녀왔다고요?”
“에반 집에. 에반 보고 와쎠여.”
“…….”
그는 생각이 많아졌다.
루시아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리도 빨리 후회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없어지자마자 접근한 안톤 공작.
그가 성녀라는 것을 아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왕녀의 신분이라는 사실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빼돌릴 만한 작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걸 알고서도 그녀가 성역에 있는 건, 어쩌면 아이의 손을 잡고 등하원을 믿고 맡긴 것처럼 주변을, 저를 깊게 신뢰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
하지만 그 마음을 깨달아도 늦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이제 다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니.
곧 도착한 아르키스의 입국소.
그는 다음 마차로 갈아탈 짧은 시간에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의 딸에게 눈 맞췄다.
“……니아 저하. 절 보세요.”
“……?”
“지켜드릴 겁니다. 그러니 허락 없이 다른 곳으로 가시면 절대 안 됩니다. 특히 안톤 공작님과 마주치신다면, 무조건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그의 엄중하고 진지한 눈빛에 니아는 뭔가 고민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을 자그마한 입술을 꼼지락대더니 겨우 떼었다.
“……리온 선섕님.”
“네.”
“에반이 그래쎠. 니아눈 안데여.”
“?”
“리온 선섕님이쟈나. 맨날 데려다 줘쨔나.”
“그게 무슨 말이지……?”
아이는 좀 더 머뭇거리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 매일 데려다 줬쟈나여. 그니까 오늘도 니아, 엄마한테 데려다 주세여.”
그랬다.
엄마에게 가는 길은 항상 리온이 함께.
아무리 그를 원수처럼 생각했다지만, 항상 손을 마주 잡고 가는 건 리온.
“…….”
리온은 아이의 말에 안 그래도 복잡한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루시아는 한번 정한 일은 반드시 해내고, 그런 그녀의 각오까지 벌써 확인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세상을 단절하고 그곳에 있는 루시아에게 아이를 데려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의 사실이 그의 마음을 단순하게 간추렸다.
눈앞에 있는 성스러운 성녀는, 그저 단순히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라는 걸.
니아는 리온이 입을 다물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그동안 니아가 너무 실타고 해찌. 미얀. 니아, 미안해해여. 니아 아랴. 이담에 엄마랑 결혼두 하구, 니아 동생두 낳구……. 그래도 갠챠나. 니아 시러해두 갠차나. 그러니까, 그러니까…….”
리온은 아이의 말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그 뜻은 급하게 생각한 변명도 아니었고, 오랫동안 고민했다는 흔적.
누구에게나 상냥하던 아이가 유독 자신에게만 퉁명스러웠던 이유, 그건.
‘……전부 내 존재로 인해 엄마에게 버려질 것 같아서 그랬던 거야.’
리온은 눈을 감고, 가뜩이나 작아 초라한 아이의 몸을 안았다.
“……그만.”
모녀가 하는 짓이 너무 똑같다.
어떻게 이걸 거절하라고.
똑같이 너무도 잔인했다.
“니아, 가서 엄마가 나오지 않으면 포기하는 거야.”
“……왜 엄마가 안 나와? 무슨 일 이쎠……? 엄마 아파?”
아이는 꿨던 꿈을 떠올렸다.
힘없는 엄마의 뒷모습.
리온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약속해. 앞으로도 오늘처럼 내가 데려다주면 유치원도 가고, 더 커서 아카데미도 잘 가는 거야.”
“안니, 안니야. 니아가 가면 엄마눈 나와여……!”
아이는 꿍한 얼굴로 말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지키지 않으면 데려다주지 않을 거야.”
“으, 으으웅! 약속. 약속이야……!”
리온은 그 후로도 한참을 아이를 끌어안았고, 니아도 괴로워 보이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 그 둘의 애틋한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
결혼 허락을 맡으러 간 베를.
그가 돌아와 입국소에 머물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근처 막사에 몸을 숨겨, 자신의 입을 막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아 전하께서는……. 돌아올 생각이 없으신 거다.’